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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美 12.12때 신군부에 불만..민간정부 지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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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집국 기자

승인 : 2010. 02. 22. 20:35

1979년 신군부에 의한 12.12 사태가 발생한 직후 미국이 한국 정부와 신군부에 대해 극도의 불만을 표시하고 정치적으로 민간정부를 전폭 지지한다는 입장을 전달한 사실이 공식 외교문서로 확인됐다.

외교통상부는 이 같은 내용이 담긴 1979년 문서들을 중심으로 모두 1천270여권(18만여쪽)의 외교문서를 22일 공개했다. 정부의 외교문서 공개는 올해로 17번째를 맞는다.

공개된 문서에는 고(故) 박정희 대통령이 서거한 10.26 사건과 12.12 사태, 고상문씨 납북사건, 재일동포 김희로씨 사건, 주한미군 철수, 일본 홋카이도 근해 한국어선 조업 문제, 한덕수 조총련 의장의 방북 등을 둘러싸고 당시 긴박했던 한국 정부의 대응동향과 외교비화가 상세히 수록돼있다.

12.12 사태와 관련한 외교문서에 따르면 미국 정부는 신군부의 쿠데타가 발생한 직후 리처드 홀부르크 국무부 차관보와 윌리엄 글라이스틴 주한 미국대사를 통해 한국 정부와 신군부측에 강한 유감과 우려를 표명했다.

미국 정부는 특히 이 과정에서 신군부가 작전통제권 행사와 관련한 한.미간의 합의를 위반한데 대해 백악관과 군부의 강력한 불만을 전달하고 향후 민간정부를 전폭 지지하겠다는 입장을 표명, 12.12 사태 직후 미국과 신군부측간의 긴장이 고조돼있었음이 공식문서로 확인됐다.

홀부르크 차관보는 쿠데타 발생 이틀만인 14일 오후 5시(현지시각) 김용식 당시 주미대사를 초치, "현재와 같은 여건에서는 미국 내에서 한국에 불리한 여론이 크게 대두될 것"이라며 "군 체제가 너무 급격하게 변동돼 군 지휘 체계가 동요될 수 있어 김일성이 군사적인 모험을 감행할 가능성이 있다"고 밝혔다.

윌리엄 글라이스틴 당시 주한 미국대사는 쿠데타 발생 이튿날인 13일 최규하 대통령, 14일 전두환 보안사령관을 만난데 이어 19일 박동진 외무장관을 면담해 "한국군이 미국측과의 협의를 완전히 무시하고 대대와 사단병력을 자의로 이동해 한미 연합군의 군사적 유효성과 행동의 자유를 지극히 훼손했다"고 지적했다.

글라이스틴 대사는 특히 "미 군부는 극도의 불만을 표시하고 있고 이러한 불만은 주한미군 사령관으로부터 미 합참의장을 거쳐 백악관의 최고위층에 이르기까지 공통된 것"이라며 "미국 정부는 어디까지나 한국의 민간 정부와 상대할 것이며 민간 정부를 전폭적으로 지지할 것(hundred percent support)"이라고 강조했다.

이에 대해 당시 외무부는 김용식 대사에게 훈령을 내려 ▲(정승화 육참총장 체포와 관련한 군내 동요) 사태가 잘 수습됐으며 ▲정치발전 체계를 점진적으로 추진해 나간다는 최규하 정부의 입장을 홀부르크 차관보에 전달하도록 했다.

또 주한미군 철수문제와 관련한 외교문서에 따르면 1979년 6월 서울 한미정상회담을 앞두고 당시 박정희 정부와 지미 카터 미 행정부는 주한 미 지상군 철수 문제를 둘러싸고 심각한 갈등을 벌인 것으로 드러났다.

주한미군 철수문제는 카터 대통령이 1976년 대선공약으로 제시한 뒤 1977년 7월 10차 한미연례안보협의회에서 최초 철군일정이 합의되면서 표면화됐으며 이후 1978년 4월 카터 대통령은 당초 철군계획을 조정, 공식 발표했다.

박정희 정부는 당시 외무부에 의해 작성된 한미 정상회담 의제관련 문건에서 "주한 미 지상군의 한국주둔은 북괴도발에 대한 실질적인 억제 전력역할을 수행해왔고 한국은 미국을 반공보루의 혈맹으로 가장 신뢰하고있다"며 미국측의 주한미군 철수를 저지하기 위한 대응논리를 치밀하게 수립했다.

미국의 주한미군 철수계획은 양국 정상회담을 거치며 취소됐고 같은해 8월 8월 카터 대통령이 박 대통령에게 "한국을 제외한 미.북간의 평화협정 대화에 동의하지 않는다"는 내용의 친서를 보내는 등 양국관계는 다시 정상궤도로 돌아섰다.

그밖에 1979년 2월 중국-베트남 전쟁 당시 베트남을 지원하던 소련이 남중국해에 군함을 배치하는 등 소련과 중국이 정면충돌 직전까지 갔던 외교비사와 1979년 3월 당시 한덕수 재일조선인총연합회 의장(2001년 2월 사망)의 북한 방문문제를 놓고 한국과 일본 정부가 치열한 신경전을 전개했던 일화가 뒤늦게 드러났다.

편집국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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