닫기

[전형찬기자의 대학로 오디세이] 재난을 마주한 정치와 인간의 윤리를 묻다

기사듣기 기사듣기중지

공유하기

닫기

  • 카카오톡

  • 페이스북

  • 트위터 엑스

URL 복사

https://ssl1.asiatoday.co.kr/kn/view.php?key=20250702010001352

글자크기

닫기

전형찬 선임 기자

승인 : 2025. 07. 02. 15:10

연극 ‘관저의 100시간’,
재난의 순간, 책임은 어디에 있었는가
후쿠시마를 넘어 한국 사회에 닿는 질문들
KakaoTalk_20250702_144811060
사진 네버엔딩플레이
아시아투데이 전형찬 선임 기자 = 연극 '관저의 100시간'은 동일본 대지진과 후쿠시마 원전 사고 당시의 실제 상황을 기반으로, 국가가 재난을 어떻게 감당하는지를 되묻는 집단극이자 기록극이다. 그러나 이 작품이 단지 일본 사회의 특정 재난을 무대화한 데 그치지 않는 이유는, 그 질문이 오늘의 우리 사회, 우리의 위기 대응 시스템, 우리의 권력 구조를 향하고 있기 때문이다.

작품은 무대를 총리 관저 안으로 국한하지 않는다. 관저를 축으로 삼아 시민, 목장 노동자, 피난민, 동성 커플, 원전 기술자에 이르기까지 국가의 가장 높은 자리와 가장 낮은 삶의 현장을 촘촘히 엮어내며 '책임', '결정', '윤리'의 문제를 집요하게 추적해 나간다.

무대 위에서는 총리와 장관, 관료와 기술자, 시민들의 역할이 끊임없이 호출된다. 서로를 부르고, 지시하고, 책임을 미루며 결정을 재촉하는 장면들이 이어지지만, 그들은 개별 인물이라기보다 국가 시스템 안에서 반복되고 소모되는 기능으로 느껴진다. 관객이 끝내 마주하는 것은 그들의 이름이 아니라, 주저하며 내뱉는 말과 표정, 그리고 떠맡겨진 선택의 무게다. 바로 그 풍경이야말로 우리가 기억하는 재난의 실체이자, 지금 이 사회를 구성하는 가장 현실적인 장면이다.

KakaoTalk_20250702_144811060_02
KakaoTalk_20250702_144811060_06
사진 네버엔딩플레이
작품은 총리 관저의 회의실 장면으로부터 시작된다. 불법 정치자금 수수 의혹에 휩싸인 총리는 기자회견을 준비하고, 참모들은 연예인 스캔들이나 북한 미사일 도발과 같은 외부 이슈를 활용해 시선을 돌릴 방안을 모색한다. 내부에 위기가 있지만, 정치는 여전히 익숙하게 작동한다. 그러나 그때 갑작스러운 대지진이 발생하며 상황은 완전히 전환된다. 정전과 통신 두절, 매뉴얼의 공백, 책임을 회피하는 기업, 결정을 미루는 정치인들이 뒤얽힌 이 공간은 곧 '위기 대응'이라는 이름 아래 다시 모이지만, 회의는 끝내 어떤 실질적 조치도 만들어내지 못한다. "확인 중입니다"라는 말만 반복되는 회의실은 텅 빈 구조물처럼 기능을 상실하고, 그 안의 인물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음으로써 가장 끔찍한 선택을 반복하게 된다.

동시에 무대는 후쿠시마의 현실로 옮겨간다. 축산 농가에서는 생계를 위한 선택과 가족의 미래를 두고 갈등이 벌어지고, 법적으로 가족이 아닌 동성 커플은 위기 상황에서 서로를 보호할 수 없는 현실을 마주한다. 구조 현장에서는 복잡한 절차와 준비 부족으로 대응이 계속 지연된다. 일상의 균열은 재난 앞에서 고스란히 드러나며, 각자의 자리에서 감당해야 할 현실이 무대 위로 차례차례 호출된다. 이 일상적인 갈등과 무력한 상황들은 전혀 극적이지 않게 흘러가지만, 그 안에 담긴 진실은 오히려 뉴스보다도 냉정하고 강렬하다. 이 연극의 정서적 파고는 눈물이나 분노에서 오지 않는다. 아무 일도 하지 못한 채 서로를 놓아야 했던 사람들의 침묵에서 온다.

KakaoTalk_20250702_144811060_01
KakaoTalk_20250702_144811060_05
사진 네버엔딩플레이
'관저의 100시간'은 배우들이 고유한 인물을 맡아 서로 다른 삶의 층위를 병렬적으로 구성해 나가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등장인물들은 하나의 거대한 서사에 엮이지 않으면서도, 닮은 불안과 책임의 경계 위에 서 있다. 무대 위에서 그들의 말과 침묵, 고립된 태도는 '책임을 지지 않거나, 대신 떠안게 되는 존재'라는 공통된 감정으로 수렴된다. 정교한 세트나 사실적인 무대장치 대신 최소한의 이동식 구조물만으로 수많은 공간을 구현하는 무대 연출은, 이처럼 단절되고 고립된 인물들의 삶을 더욱 부각시킨다. 후쿠시마의 농가와 도쿄 관저, 원전, 고립된 마을이 빠른 호흡으로 전환되지만, 그 안에서 반복되는 언어와 침묵은 하나의 감정적 리듬으로 관객에게 각인된다. 디테일한 재현보다는 불완전한 잔상과 상황의 공기를 전하는 방식으로, 이 작품은 '재난'이라는 사건이 남긴 심리적 리얼리즘을 끝까지 붙든다.

극의 후반부로 갈수록 시간은 압축되고 서사는 밀도 높게 이어진다. 관저는 결국 벤트를 결정하고, 몇 명의 노동자가 피폭을 감수하며 원자로 앞에 선다. 누군가는 그렇게 해서 "겨우 25%의 압력 배출"에 성공하지만, 그들을 기억하는 이는 없다. 작품은 끝내 누구도 기소되지 않았고, 누구도 책임지지 않았으며, 구조적으로 아무것도 바뀌지 않았다는 사실을 조용히 고발한다. "우리는 다 살지 못했다. 그러나 모두 죽지도 않았다. 우리는 남았다"는 대사는 이 연극이 단지 절망의 반복이 아니라, 그럼에도 남겨진 자들이 증언하고 기록해야 할 현실임을 말한다.

KakaoTalk_20250702_144811060_03
KakaoTalk_20250702_144811060_04
사진 네버엔딩플레이
'관저의 100시간'은 정치극이다. 동시에 인간극이며, 윤리극이고, 다큐멘터리적 증언이기도 하다. 대사 한 줄, 장면 하나가 관객의 감정을 선동하려 하지 않음에도 불구하고, 객석은 묘한 정적과 비명을 오간다. 이는 연극이 현실을 흉내 내기 때문이 아니라, 그 현실 안에 우리가 여전히 살고 있기 때문이다. 재난은 이미 끝난 과거가 아니라, 오늘을 살아가는 방식에 따라 언제든 반복될 수 있는 현재이기 때문이다. 작품은 묻는다. 우리는 다음 재난의 순간에도 이처럼 결정하지 못한 채 서로를 내버려둘 것인가? 관저는 과연 특정 정부의 실패로만 남아야 하는가?

책임을 진다는 것은 무엇인가, 리더십이란 과연 결단의 문제인가, 혹은 희생의 문제인가. 연극은 이 질문을 끝까지 남긴 채, 우리 모두를 무대의 연장선에 놓는다. 원전이 터진 날, 관저의 100시간이 지나간 그 순간을 연극은 기록한다. 하지만 정작 작품이 말하려는 것은 그 이후의 100시간, 그리고 우리가 무엇을 선택할 것인지에 대한 '다음 장'이다.

그날의 관저를 응시하는 이 연극은, 단지 일본의 이야기로 끝나지 않는다. 그 속엔 우리가 목격한 많은 실패들, 반복된 재난의 이미지, 그리고 무책임한 말들 속에 흔들렸던 우리의 얼굴이 고스란히 투영되어 있다. 그러므로 이 작품은 과거에 대한 보고서가 아니라, 우리가 되지 않기 위한 선언이자 다짐이다.

'관저의 100시간'은 거창한 감정보다 조용한 각성을 유도한다. 무엇이 옳은 일인지, 누가 결정을 내리고 책임을 져야 하는지, 우리는 다시금 묻게 된다. 그리고 그 물음은 무대 밖, 우리의 삶과 사회로 옮겨간다.
전형찬 선임 기자

ⓒ 아시아투데이, 무단전재 및 재배포 금지

기사제보 후원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