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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큐레이터 김주원의 ‘요즘 미술’] 필경 환대가 될 예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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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5. 04. 01. 18:03

장-마리 해슬리, 염소자리 Ⅱ, 1987
장-마리 해슬리, <염소자리 Ⅱ>, 1987, 캔버스에 유채, 194.5x235cm장-마리 해슬리의 1주기 추모전시 <장-마리 해슬리, 별이되다>가 갤러리138(송파구 소재)에서 열리고 있다.
"사람이 온다는 건/실은 어마어마한 일이다./그는/그의 과거와/현재와/그의 미래와 함께 오기 때문이다./한 사람의 일생이 오기 때문이다./부서지기 쉬운/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마음이 오는 것이다./그 갈피를/아마 바람은 더듬어 볼 수 있을 마음/내 마음이 그런 바람을 흉내 낸다면/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정현종의 '방문객'.

정현종 시인의 시 '방문객'은 수많은 타자와 나의 만남이 서로 다른 세계와 세계의 만남이라는 깊은 철학적 통찰을 담고 있어 늘 뜨거운 울림을 준다. 시인은, 한 사람이 다가올 때 우리는 그의 과거, 현재, 미래까지 맞이하고 있으며, 우리가 흔히 마주하는 사람과의 만남이 사실 얼마나 어마어마한 사건인지 상기시킨다.

프랑스 출신의 미국인 화가 장-마리 해슬리(Jean-Marie Haessle, 1939~2024)의 그림 '염소자리 II'(1987)는 다른 하나의 세계를 마주하는 일이 필경 환대가 될 것이라는 시인의 말을 떠올리게 한다. '우주', '성좌', '은하수'등 유독 밤하늘 관련 연작을 즐겨 그렸던 해슬리의 '염소자리 II'는 특정한 별자리를 그린 그의 드문 그림이다. 하늘의 바다에 해당하는 남쪽 하늘에 놓인 성좌 '염소자리'는 한 해를 시작할 때 태양이 머무는 별자리로 여러 별자리 가운데 어두운 별자리에 속한단다. 그리스 신화에선 종종 아버지인 크로노스에게 잡아먹힐 뻔했던 제우스를 염소의 젖을 먹여서 길렀던 님페 '아말테이아(Amalthea)'로 인식된다는 성좌이기도 하다.

'염소자리 II'는 드라마틱한 격정적 붓질로 생동하는 색채 감각이 화면 전체에서 과시되고 있다. 푸른 듯 깊은 바다를 연상시키는 그림 바탕은 동시대 추상표현주의자들의 올 오버 페인팅에 공감하지만, 그림 중앙에서 밤하늘의 불꽃처럼 터지는 폭발적인 색채 에너지는 성좌'염소자리'가 화가에게 어떤 의미였는가를 생각하게 한다. 화가는, 어두워 고요할 것만 같은 밤하늘을 격정적인 빛을 발산하는 성좌'염소자리'로 가득 채웠다. 푸르고 보라색 바탕 위에 파랑, 하양, 검정, 노랑, 간간히 빨강, 초록 등등의 날것 자체의 안료가 지닌 물성을 일깨우며 극적인 긴장감을 과시하고 있다. 그림 속 밤하늘과 별자리의 경계는 허물어지고 우리는 화가의 치열하고 절실한 탐구와 강렬한 희망과 위로의 메시지에 마음을 빼앗긴다.

여기서 우리는 해슬리의 그림에서 그가 '환대'했던 무수한 만남을 상상할 수 있다. 특히, 지칠 줄 모르는 탐구와 실험을 게을리하지 않았던 해슬리에게 빈센트 반 고흐(Vincent Willem van Gogh, 1853~1890)와의 만남은 주목할 만하다. 지난해 봄 작고하기 전 해슬리는 반 고흐와의 두 번의 만남을 여러 차례 회고한 바 있다. 첫 만남은 1957년 알 수 없는 병으로 입원 치료 중 형으로부터 선물 받은 책 "반 고흐의 생애"를 통해서 이다. 이 책은 그에게 감명을 주었고 몇 점의 연필 드로잉도 그리게 했다. 두 번째의 만남은 1960년 어느 날 군 입대 후 휴가 중에 들른 뮌헨의 현대미술관인 '노이에 피나코텍(Neue Pinakothek)'에서 실물로 처음 마주한 반 고흐의 작품 '해바라기가 있는 풍경'(1888)이다. 반 고흐와의 예기치 못한 첫 만남과 재회는 장-마리 해슬리가 예술을 시작하고, 자신의 예술생애 내내 반 고흐의 표현주의적 미학의 탐구 태도와 공명하게 하였다.

장-마리 해슬리의 '염소자리 II'는 반 고흐의 밤 풍경 그림 가운데 수작으로 꼽히는 '별이 빛나는 밤'(1889)을 떠올리게 한다. 두 그림 모두 밤하늘의 '별'이 테마다. '별이 빛나는 밤'은 빈센트 반 고흐가 아를에서 1888년 고갱과의 불화로 귀를 자른 자해 사건 후 우울증 치료를 위해 스스로 입원한 생 레미 요양원 시절(1889~1890)의 작품이다. 반 고흐는 당시의 다른 인상주의 작가들과 같이 낮 풍경도 많이 그렸지만, '별이 빛나는 밤'과 같은 밤 풍경을 유독 많이 그렸다. 밤이 낮보다 더 살아있고 더 풍부한 색채를 지녔음을 확신한 반 고흐에게 밤과 별은 어쩌면 세상 속 자신처럼 느껴졌을 것이다. 열두 개의 성좌 가운데, 두 번째로 어두운 별, 새로운 시작의 순간 태양이 머무는 별, 그리고 불신과 위기, 그리고 죽음에 직면한 자를 위로하고 돌보는 님페 같은 별인'염소자리'를 그린 장-마리 해슬리처럼!

그렇다. 그 누구도 지나가는 시간으로 오는 것이 아니다. 자신이 살아온 모든 시간과 앞으로의 날들까지도 함께 가지고 온다. 하나의 일생이 '하나의 세계'로서 온다. 그 누구의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마음을 기꺼이 마주한다는 일은 시인의 말처럼 필경 '환대'가 될 것이다. 환대란 내게 오는 방문객, 그 타자에게 집중하는 능력이라고 한다. 장-마리 해슬리는 반 고흐 등의 예술세계에 집중함으로써, 부서지기 쉬운 그래서 부서지기도 했을 자신의 세계를 다시금 확고하게 구축할 수 있었을 것이다. 그가 집중하고 환대했던 세계가 반 고흐뿐이겠는가! 그의 그림 앞에서 그로부터 위로받고 나를 새롭게 돌아보는 지금, 나 역시 그가 환대하는 방문객이다. 필경, 환대가 될 모든 예술에 존경을 드린다.

/큐레이터·미학 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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