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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일현의 文香世談] 다시 봄, 우리 안의 네흘류도프를 깨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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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인 : 2026. 02. 22. 17:26

윤일현 시인·교육평론가
윤일현 시인·교육평론가
지난겨울, 우리 마음의 온도는 기온계의 숫자보다 훨씬 낮았다. 단순히 날씨가 추워서가 아니라, 서로를 향한 마음의 빗장을 완강히 걸어 잠갔기 때문이다. 서로의 안부를 살필 여유도 없이, 우리는 저마다의 체온을 지키는 일에만 몰두했다. 각자는 자신만의 아늑한 고립된 공간으로 숨어들어, 오직 나의 안녕만을 확인하며 문을 걸어 잠갔다. 손바닥 안의 스마트폰 화면 속에서는 충혈된 문장과 분노의 언어들이 겹겹이 쌓여갔다. 짧고 자극적인 제목들이 타인에 대한 혐오를 부추길 때, 우리의 영혼은 소리 없이 마모되었다. 누구보다 정의로운 척 목소리를 높였지만, 정작 자신의 비겁함에는 관대했던 초라한 자화상을 떠올린다.

이제 겨울은 지나간다. 우리가 겪고 있는 마음의 겨울 또한 끝날 수 있을 것인가. 이 황폐한 마음의 동토에도 끝이 있다면, 우리는 어떤 대가를 치러야 그 눈부신 시작을 마주하게 될 것인가. 계절의 끝자락에서 레프 톨스토이의 '부활'을 떠올리는 것은 필연에 가깝다. 소설은 우리에게 조용히 묻는다. 인간 사회는 어쩌다 이토록 혼탁해졌으며, 우리는 무엇을 동력 삼아 다시 태어날 수 있는가. 봄을 맞이하는 대지가 깊은숨을 고르듯, 인간 사회 역시 재생과 부활을 진지하게 사유해야 할 시간 앞에 서 있다.

톨스토이는 '부활'을 통해 사회의 타락이 거대한 악이나 극단적인 범죄에서 비롯된다고 말하지 않는다. 대신 무감각과 자기기만, 타성으로 굴러가는 관행을 통해 인간의 서글픈 몰락을 드러낸다. 법은 명문으로 존재하나 정의는 희미하고, 종교는 삶을 비추는 등불이 아니라 형식적인 의례와 껍데기만 남았다. 교육은 인간을 깨우는 배움이 아니라, 순응을 길들이는 절차로 전락했다. 책임은 언제나 힘없는 약자의 몫으로 전가된다. 그는 인간이 본래 악해서 타락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하기를 멈췄기 때문에' 타락한다고 단언한다. 소설 속 부활은 사후에 일어나는 신비로운 기적이 아니다. 생각하기를 포기했던 인간이 마침내 자신을 성찰하고, 타인의 고통을 예민하게 감각하기 시작할 때 일어나는 내면의 거대한 각성이다.

이야기는 귀족 네흘류도프가 배심원으로 참석한 법정에서 시작된다. 그는 피고석에 선 여인, 카튜샤를 마주하고 큰 충격을 받는다. 그녀는 젊은 시절 자신이 유혹하고 무책임하게 내버렸던 하녀였다. 배심원의 부주의와 불합리한 판결 속에서 카튜샤는 억울한 유죄 선고와 함께 시베리아 유형을 선고받는다. 그 순간 네흘류도프는 자신은 분명 죄를 지었으나 신분과 재산의 보호막 뒤에 숨어 한 번도 대가를 치르지 않았다는 사실을 직시한다. 그의 양심은 뒤늦게 깨어나고, 타성에 기대어 이어온 삶이 모래 위에 세워졌음을 통절히 고백한다.

네흘류도프는 자책이라는 감옥에 갇히는 대신 길을 떠난다. 그는 기득권을 내려놓고 카튜샤의 판결을 바로잡기 위해 상소하며, 그녀를 따라 시베리아로 향한다. 감옥과 유형지를 거치며 그는 인간을 숫자로만 취급하는 권력의 폭력과 위선적인 종교의 민낯을 목격한다. 톨스토이는 이 여정을 통해 끈질기게 질문을 던진다. 법은 과연 누구를 보호하기 위해 존재하는가. 네흘류도프의 부활은 맹목적 신뢰를 거두고, 그것이 인간을 어떻게 소외시키는지 정면으로 응시하는 데서 시작된다.

소설이 도달하는 가장 눈부신 지점은 네흘류도프의 참회 너머에 있다. 카튜샤는 그의 청혼을 단호히 거절한다. 그녀는 더 이상 그의 죄책감을 덜어주거나 속죄를 완성해 주는 도구가 되기를 거부한다. "나는 당신의 선행으로 구원받고 싶지 않다"라는 그 말은, 진정한 부활이 누군가의 시혜나 대리 만족으로 이루어질 수 없음을 예리하게 찌른다. 각자는 자신의 몫으로, 주어진 고통을 통과하며 스스로 다시 태어나야 한다는 이 냉정하면서도 준엄한 선언은 오늘 우리에게 묵직한 과제를 남긴다.

우리는 법적 절차나 형식적 사과로 책임을 다했다고 여기곤 한다. 그러나 톨스토이가 말하는 책임은 내 안락함이 누군가의 희생 위에 쌓인 특권은 아닌지 끊임없이 묻는 일이며, 이전과 다르게 살겠다는 결단이다. 또한 침묵으로 방조해 온 부당함 앞에서 더 이상 중립을 가장하지 않겠다는 선택이기도 하다. 이 결심은 거창한 선언이 아니라 일상에서 시작된다. 혐오 댓글 대신 침묵을 선택하는 용기, 이웃에게 건네는 안부, 타인의 불행을 구경거리로 소비하지 않는 단호함이 그것이다. 부활이란 오만이 아니라 자신의 안일에 맞서 삶의 방향을 스스로 돌려세우는 용기다.

새봄이 다가오는 지금, '부활'은 우리에게 잠시 멈추어 서서 생각하라고 요구한다. 나 역시 이 긴 겨울 동안 얼마나 쉽게 타인의 고통에 무감각해졌는지 돌아본다. 편리한 외면 속에서 자라난 부도덕함이 혹 나의 침묵에서 비롯된 것은 아닌지 자문한다. 새봄에 우리는 완성된 인간을 꿈꾸지 않아도 된다. 다만 카튜샤가 보여준 단호한 주체성과 네흘류도프가 내디딘 자기 응시의 첫걸음 사이에서 각자의 길을 찾아야 한다. 구호나 제도가 아닌, 개인이 감당해야 할 몫을 선택하겠다는 결심이 필요한 때다.

사회와 개인의 부활은 서로를 비추는 거울이다. 성급한 판단보다 깊은 성찰이, 처벌보다 먼저 각자가 감당할 몫을 인정하는 책임이 선행될 때 우리 공동체는 다시 숨 쉴 수 있다. 부활은 초월적 기적이 아니라 땅속에서 움트는 생명의 맥박이다. 이 변화는 타인의 아픔에 공명하며 곁을 내어주는 연대로 이어진다. 동토를 밀어 올리는 새순의 기척이 들리는가. 타인의 고통에 응답하려는 그 용기가 곧 봄이다. 그 생명력 앞에 우리는 겸허하게 서야 한다.

/윤일현(시인·교육평론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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